[글마당] 타오르는 방
남으로 가득 창이 난 은밀하게 나를 데우는 따사로운 햇살에 세포는 속속들이 익어가고 나는 가슴 깊이 햇빛을 들이마시며 투명해진다 미켈란젤로도 항복한 눈부신 아침 햇살 찰랑찰랑 수런대는 나뭇잎들의 대화 맑은 바람 소리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연주되기를 기다린다 갓 태어난 모음과 자음이 수줍게 속삭일 때 말러의 심포니 5번의 아다지오가 살짝 고개를 들면 지하에서 백 년째 숙성되고 있던 와인 마지막 남은 기포 한 방울 혼 심으로 밀어 올리고 불립문자들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하고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는 제로 존 (zero zone)에서 와인 맛은 그윽해진다 꿈이 고이는 밤이 되면 옷을 벗고 가면을 내려놓고 화장을 지운다 낮에 걸쳤던 나를 벗어던지고 봄의 잔상에 젖은 불 속으로 찬란하게 타들어 간다 삶을 퇴고하고 사랑을 번복하며 나는 길들이고 길들여진다 아픈 짐승처럼 울음을 토하며 나를 태우는 나의 방! 정명숙 / 시인·롱아일랜드글마당 zero zone 아침 햇살 심포니 5번